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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사람과 법 이야기] 보고도 못 보는 病

  • 입력 : 2017.12.22 17:11:42     수정 : 2017.12.22 17:19:5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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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는 스스로 장착된 자동처리 직관 시스템 덕분에 복잡한 계산 없이도 달려오는 차를 피해 잘도 도로를 건너 다닌다. 하지만 아뿔싸, 길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직관이 늘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. 무언가 착각이 있을 터. 그중 다가오는 차를 제때 못 봤다는 허물이 크다. 바로 자신 앞까지 다가온 차를 전혀 보거나 느끼지 못했다는 실수담이 대종을 이룬다.

우리는 왜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때론 못 보는 것일까? 과학자들의 전언에 의하면 사람들은 세상 사물을 자신이 생각하는 맥락 속에서 감지하고 이해한다. 문제는 그 맥락이 잘못된 것일 때 발생한다. 한적한 길이라 당연히 자동차가 없을 것이라는 오도된 추론의 함정. 여기에 방심하면 눈앞의 자동차도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. 필자가 막 초보운전 딱지를 뗄 무렵의 일이다. 조용한 시골길에서 안심하고 좌회전하다가 큰 사고를 당할 뻔한 경험이 있다. 다행히 상대방 운전자가 피해줘 무사했지만(다만 욕은 꽤 먹었다) 지금도 직진차를 못 본 그때 기억을 떠올릴라 치면 식은땀이 나곤 한다.

지금부터 20년 전 어느 학술 모임(법심리학 포럼)에서 인간의 지각에 관한 체험적 강연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. 강사는 농구 선수들이 공을 패스하는 동영상을 보여주었다. 이 동영상에서 농구공 패스 횟수를 세어 보라는 주문을 받고 패스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집중해 그 수를 세었다. 이어진 강사의 질문은 엉뚱하게도 이 동영상에서 고릴라를 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. '아니, 웬 고릴라?'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, 맙소사, 다시 틀어진 동영상에서는 고릴라 분장을 한 연기자가 유유히 선수들 틈을 비집고 돌아다니는 생소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!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청중의 4분의 3은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.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연기자가 화면 정중앙에서 가슴을 탕탕 치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는데도 말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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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체험 강연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실제로 수행한 유명한 심리학적 연구에 기초한 것이었다. 우리나라에서도 이들의 연구는 '보이지 않는 고릴라'라는 제목의 교양서로 소개됐다. 이 연구는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과제에 몰두하게 되면 주의력 고갈로 당연히 볼 것을 못 보는 오류를 일으킬 수 있음을 잘 일러주고 있다. 그리고 어떤 프레임 속에 빠지면 그에 현혹된 나머지 다른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명확한 정보를 놓치는 실수를 범한다는 것도 체험적으로 알게 해준다.

특히 부모님,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는 범생이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기 과신에 잘 빠지는 사람일수록 고릴라를 못 볼 개연성이 커질 수 있단다. 오히려 주의력이 산만하고 농구공 패스 숫자를 세는 데 따분해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릴라를 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. 그때 청중 대부분은 판사, 교수였는데 이런 부류들이 그래서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더 클 수도 있다. 판사직은 원래 재판이란 일을 하면서 볼 것, 못 볼 것을 두루 다 봐야 하는 자리다. 그런데 자기 편견과 과신 때문에 반쪽만 �릿� 우를 범한다면 이건 큰일이다.

눈을 부릅뜨고 봤는데도 못 본 것이 있다니. 이 체험 덕분에 내 자신도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는 자괴심을 갖게 됐다. 다만 그 이후 20년. 실제 법적 분쟁을 다루면서 이런 자책을 계속 교훈으로 삼았는지 별 자신은 없다.

연말이다. 올해도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.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이런 일들로 하여 우리는 또 여러 생각을 갖게 됐다. 혹시 보고 싶은 것만 눈에 띄고 듣기 좋은 소리만 귀담아 가지게 된, 허접한 생각들은 아니었는지 걱정된다. 감히 내년에 바라건대 내가 뭘 몰랐는지, 또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마음병이 조금이라도 고쳐졌으면 좋겠다.

[김상준 변호사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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